유관순을 가르친 사애리시(앨리스 샤프) 선교사

그 당시 한국 여성들의 삶은 항상 남자보다 열등했으며, 그렇기에 사람들이 보는 여성 선교사의 위치는 매우 낮았다. 그 당시 여성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부여받지 못했다.전도 여행을 다닐때 교회를 여럿 들렸는데, 교회에 여성이 없었다. 그 당시 여자들은 생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애리시 선교사는 공주 교회에 화를 내면서 여자들도 믿을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공주 교회 교인들과 약속했지만 다음에 다시 방문했을때에도 여자가 한명도 없었다고 한다.그 후로 남/여가 서로 볼 수 없게 ㄱ자 건물을 만들어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 이후 10년만에 1913년 부터 여자 성도가 많아지기 시작했다.사애리시 선교사의 행동으로 충청지역 여성의 지위가 점차 회복되었다. 남성으로 부터의 해방과 낮은지위로 부터의 해방, 인간으로서 존엄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사애리시 선교사가 어떻게 이 일을 해나갔는가?다른 선교사들과 동역하며 순회 전도 활동을 해나갔다. 또한 마을에 가서 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너는 남자와 똑같다.'고 말하고, 여자들을 가르치던 모임이 발전되어서 여러 학교들이 설립 되었다.그 당시 제자들은 어떻게 활동했냐하면, 1905년부터 여성을 위한 교육이 실행되었다. 12명의 소녀들과 자기 방에서 매일 학교를 했다. 매일 학교를 할때에 이화학당에서 가져온 것들을 가지고 교육했다. 또한 사애리시 선교사의 교육목적은 '여성차별적인 무지한 관습과 미신에서 진리로의 해방'이었다. 더 나아가서 기독교 선교가 남성과의 관계에서 여성의 지위를 회복시키는 일과, 사회적 약자로서의 비속감 탈피였다.그 당시에 어떤 부모가 쉽게 보내려고 했겠는가? 그렇지만 조금 꺠어있는 부모들은 여자들을 보내고자 했었다. 근데 보내지 않은 큰 이유는 빨리 결혼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관습이었기 때문이다.그녀의 대표적인 제자 중 유관순 열사가 있다. 유관순 열사의 오빠가 영명학교에 다녔었고, 거기서 사애리시 선교사가 유관순을 이화학당으로 편입을 주선하여 이화학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똑똑한 소녀들만 보면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막들었다고 한다.사애리시 선교사가 했던 선교, 여성교육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으며 20~40년대까지 한국 교회에서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기둥이 되었으며 입지를 다졌다.여성 선교사들이 했던 주된 사역은 여성교육이다. [평등, 저항감, 비속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의식 형성]1906년에 엘리스 선교사의 남편이 죽고 그 뒤에 들어온게 조지 윌리암스(우광복) 선교사의 아버지이다. 우광복은 한국태생이며 당시 존 하지 장군의 통역관이었다.우광복의 아버지는 의식이 굉장히 깨있는 사람이었다. 3.1운동이 거대하게 일어난 천안지방의 교회에서 1919년 12월부터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 다른 선교사들이었으면 좋아라했을 것을 우광복의 아버지는 "만약 이렇게 밀려들어오는 청년들에게 기독교적인 복음을 가지고 제대로 선교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감당할 수 없는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라고 냉철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그것은 딱 맞았다. 분석력이 뛰어났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광복이 크며 자연스레 배웠을 것이다. 매우 똑똑하여서 미군전의 총사령관의 통역관이 되었다. 그 당시 통역관은 비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우광복은 인사권(사람을 뽑는 것)에도 관여했다. 영향력이 엄청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우광복과 조병옥은 굉장히 친했다고 볼 수 있다. 우광복은 선교사의 아들이고, 조병옥은 지역 교회의 설립자의 아들이다. 그리고 영명학교를 나와서 선후배 사이로 굉장히 친했다. 그래서 우광복의 추천으로 조병옥은 '경무국장'이 된다. 그 당시 경찰청장인데 모든 치안[국가 사회의 안녕과 질서 유지]을 담당하는 사람이었다.유관순, 우광복, 조병옥 세사람 모두 한국에 엄청난 기여를 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영명학교 출신'이라는 것이다.
앨리스 샤프 선교사는 1900년도에 들어와서 1939년에 일본에 의해서 추방당하여 은퇴했다. 약 40년동안 여성들을 위한 여성교육과 복음을 전했다.앨리스 샤프의 제자들은 전국으로 교육사업을 확장했다. 그리고 3.1운동때 적극적인 주도와 참여를 하였다. 앨리스 샤프는 이 민족이 어느방향으로 가야할지를 알았던 것이다. 또한 소녀들에게 향했던 사랑이 아이들과 부모를 감동시켜 더욱 효과가 뛰어났다고 본다. 복음을 살아냈다고도 할 수 있다.
영명학교 이외에도 약 20여개의 학교를 설립하였다.그 당시 여성들이 공부를 하고 글을 읽는 다는 것은 보통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조금더 깨어있고, 진보적인 생각이 있는 학교를 찾아오는 학생들이 주로 그랬다. 기독교 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진보적인 생각과 무지에서 벗어나고나 하는 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러다 보니까 나라와 민족에대한 생각도 달라지기 시작함. 나라가 망해가는 운명속에서 여성들이 해야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자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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